본문 바로가기
인생이야기

한국 근대 단편소설의 완성자, 상허 이태준 작가

by 오늘 행복 2023. 1. 16.

근대 단편소설의 완성자 ‘상허 이태준’ 선생

우리나라 근대 단편소설을 대표하는 상허 이태준 작가에 대해서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30대 후반에서 40대부터는 상허 이태준 선생이 생소하게 들릴 겁니다. 이태준 선생은 1945년 광복 후 그다음 해에 월북하여 크게 조명받지 못하였고, 1988년 해금 이후 이태준 선생에 관한 연구가 본격적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보입니다. 특히, 요즘에는 이태준 선생의 작품 ‘촌뜨기’가 고등학교 교과서에 실리고 있으며, 그의 문학성을 인정받았습니다.

이태준 선생은 사립 철원봉명학교를 졸업하였고, 휘문고보를 나와 일본 도쿄 조치대학교에서 수학하였으며, ‘시대일보’에 ‘오몽녀’를 발표하면서 문단에 등단하였습니다. 구인회(九人會)에 가담하였고, 이후 이화여전 강사, 조선중앙일보 학예부장 등을 역임하였습니다. 1930년대부터 본격적인 작품활동을 시작하였으며, ‘가마귀’, ‘달밤’, ‘복덕방’ 등의 단편소설은 인물과 성격의 차분한 내관적 묘사로 토착적인 생활을 부각시켰으며, 완결된 구성법과 함께 한국 현대소설의 기법적인 바탕을 이룩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작품 인물들은 회의적·감상적·패배적 성격으로 부각되어 작품 전체가 허무와 서정에 깊이 침윤되었지만, 때로는 그 속에서 현실과 밀착된 시대정신에의 추구를 지향하기도 합니다.

상허 이태준 선생 연보

1904년 11월 4일 강원도 철원군에서 출생
1909년 망명하는 아버지를 따라 러시아 땅 블라디보스토크로 이주. 8월 부친의 사망으로 귀국하던 중 함경북도 배기미에 정착. 서당에서 한문 수학
1912년 어머니 별세로 고아가 됨. 외조모 손에 이끌려 고향 철원 용담으로 귀향하여 친척 집에 맡겨짐
1915년 안협의 오촌 집에 입양. 다시 용담으로 돌아와 오촌 이용하(李龍夏)의 집에 기거함. 사립 철원봉명학교에 입학
1918년 3월에 봉명학교를 우등으로 졸업. 철원 읍내 간이농업학교에 입학하나 한 달 후 가출하여 여러 곳을 방랑하다 원산 등지에서 2년간 객줏집 사환 등의 일을 하며 2년여를 보냄. 외조모가 찾아와 보살핌. 이때 문학서적 탐독. 이후 중국 안동현까지 인척 아저씨를 찾아갔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고 경성으로 옴
1920년 4월 배재학당 보결생 모집에 응시하여 합격하나 입학금 마련이 어려워 등록하지 못함. 낮에는 상점 점원으로 일하며 밤에는 야학에 나가 공부함.
1921년 4월 휘문고등보통학교에 입학. 고학생으로 비교적 우수한 성적을 받음. 이때 상급반에 정지용·박종화, 하급반에 박노갑, 스승으로 가람 이병기가 있었음. 습작을 시작함.
1924년 [휘문]의 학예부장으로 활동. 동화 [물고기 이약이] 등 6편의 글을 [휘문] 제2호에 발표함. 6월 13일에 동맹휴교의 주모자로 지적되어 5년제 과정 중 4학년 1학기에 퇴학. 이해 가을 휘문고보 친구인 김연만의 도움으로 유학길에 오름.
1925년 일본에서 단편소설 [오몽녀(五夢女)]를 [조선문단]에 투고하여 입선, [시대일보](7월 13일)에 발표하며 등단함.
1926년 4월 동경 上智大學 예과에 입학. 신문·우유 배달 등을 하며 ‘공기만을 먹고사는’ 매우 궁핍한 생활을 함. 동경에서 [반도산업] 발행. 이때 나도향, 화가 김용준, 김지원 등과 교유
1927년 11월 학교를 중퇴하고 귀국함. 각 신문사와 모교를 방문하여 일자리를 구하나 취업난에 직면함.
1929년 개벽사에 기자로 입사. [학생](1929.3~10) 창간 때부터 책임자. [신생] 등의 잡지 편집에 관여함. [어린이] 지에 소년물과 掌篇을 다수 발표함. 9월 백산 안희제의 사장 취임에 맞춰 [중외일보]로 자리를 옮김. 사회부에서 3개월 근무 후 학예부로 옮김.
1930년 이화여전 음악과를 갓 졸업한 이순옥(李順玉)과 결혼.
1931년 [중외일보] (6.19 종간)기자로 있다가, 신문 폐간과 함께 개제된 [중앙일보](사장 여운형) 학예부 기자가 됨. 장녀 소명(小明) 태어남. 경성부 서대문정 2정목 7의 3 다호에 거주.
1932년 이화여전(梨專1932~1937)·이화보육학교(梨保)·경성보육학교(京保) 등 학교에 출강하며 작문을 가르침. 장남 유백(有白) 태어남.
1933년 박태원·이효석 등과 함께 ‘구인회(九人會)’를 조직. 1933년 3월 7일 [중앙일보]에서 개제된 [조선중앙일보] 학예부장에 임명됨. 경성부 성북정 248번지로 이사. 이후 월북 전까지 이곳에서 거주함.
1934년 차녀 소남(小楠) 태어남.
1935년 1월, 8월 2회에 걸쳐 표준어사정위원회 전형위원, 기록 담당. 조선중앙일보를 퇴사, 창작에 몰두함.
1936년 차남 유진(有進) 태어남.
1937년 [五夢女]가 나운규에 의해 영화화됨(주연 윤봉춘, 노재신. 이 작품이 春史의 마지막 작품임).
1938년 만주 지방 여행.
1939년 [문장(文章)]지 편집자 겸 신인 작품의 심사를 맡음 (임옥인·최태응·곽하신 등이 추천됨). 이후 황군위문작가단, 조선문인협회 등의 단체에서 활동.
1940년 삼녀 소현(小賢) 태어남.
1941년 제2회 조선예술상 받음(1회는 春園이 수상).
1943년 강원도 철원 안협으로 낙향. 해방 전까지 이곳에서 칩거
1945년 문화건설중앙협의회, 문학가동맹, 남조선민전 등의 조직에 참여. 문학가동맹 부위원장, [현대일보] 주간 등을 역임.
1946년 2월부터 민주주의 민족전선 문화부장으로 활동. 남조선 조소문화협회 이사. 7월~8월 상순 사이에 월북. [해방전후]로 제1회 해방문학상 수상. 장남 휘문중학 입학. 8월 10일부터 10월 17일까지 ‘방소문화사절단’의 일원으로 소련의 모스크바, 레닌그라드 등지를 여행.
1947년 5월 소련 여행기인 [쏘련기행]이 남쪽에서 출간됨.
1948년 8·15 북조선최고인민회의 표창장을 받음.
1949년 북조선문학예술총동맹 부위원장, 국가학위수여위원회 문학분과 심사위원이 됨. 단편 [호랑이 할머니] 발표. 이 작품은 해방 후 북한에서 발표된 ‘최고의 걸작’으로 평가됨.
1950년 6·25 동란 중 낙동강 전선까지 종군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서울에 들러 문학동맹 사람들을 모아놓고 전과 보고 연설을 함. 10월 중순 평양수복 때 ‘문예총’은 강계로 소개(疏開)하였는데 이태준은 따라가지 않고 평양 시외에 숨어 있으면서 은밀히 귀순을 모색하였다고 함. 12월 국방군의 북진을 따라 문화계 인사들이 이태준을 구출하려 했으나 실패
1952년 남로당과 함께 숙청될 위기에서 소련파 기석복(奇石福)의 후원으로 제외됨.
1954년 3개월간의 사상검토 작업 중 과거를 추궁당함.
1956년 소련파의 몰락과 더불어 과거 ‘구인회’ 활동과 사상성을 이유로 1월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상무회의 결의로 임화, 김남천과 함께 가혹한 비판을 받음. 2월 ‘평양시당 관할 문학예술부 열성자대회’에서 한설야에 의해 비판, 숙청당함.
1957년 함흥노동신문사 교정원으로 배치됨.
1958년 함흥 콘크리트 블록 공장의 파고철 수집 노동자로 배치됨.
1964년 중앙당 문화부 창작 제1실 전속작가로 복귀함.
1969년 김진계의 구술기록([조국], 현장문학사, 1991(재판))에 의하면, 1월경 강원도 장동탄광 노동자 지구에서 사회보장으로 부부가 함께 살고 있었다고 함. 이후 연도 미상이나 사망한 것으로 알려짐(북한의 원로 문학평론가 장현준과의 인터뷰 기사 - [한겨레신문], 1991. 12. 19). 일설에는 1953년 남로당파의 숙청이 끝난 가을 자강도 산간 협동농장에서 막노동을 하다가 1960년대 초 산간 협동농장에서 병사한 것으로 알려짐(강상호, [내가 치른 북한 숙청], [중앙일보], 1993. 6. 7)

상허 이태준 선생의 주요 작품

이태준 선생의 주요작품으로는 「달밤(1934)」, 「가마귀(1937)」, 「이태준 단편선(1939)」, 「이태준 단편집(1941)」, 「해방전후(1947)」, 「구원의 여상(1937)」, 「화관(1938)」, 「청춘무성(1940)」, 「사상의 월야(1946)」 등이 있고, 특히 고향 철원을 배경으로 한 작품에는 「촌뜨기」, 「무연」, 「돌다리」라는 작품이 있습니다.

다음은 이태준 선생의 대표작인 ‘촌뜨기’라는 작품을 소개하겠습니다.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자료출처 : 상허학회 홈페이지 참고

 

댓글